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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올림픽 개막식 단상: 불쾌와 희망

지난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글을 꼭 한번 써야지 하다가 여름이 다 갔습니다. 

여전히 생각해볼만한 주제라고 생각해서 늦게라도 올려 봅니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기억하시나요? 저항과 예술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보였습니다. 마리 앙투와네트의 목이 잘리는 장면이 있었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 하면서 다수의 여장 남자와 남장 여자 및 옷을 입다만 이들 등 눈을 찌푸리게 하는 요소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개막식에 관한 상반된 평가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려 섞인 분노’였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 기독교는 아직 주류다


제 소셜미디어 피드에 가장 많이 보였던 반응은, “기독교에 대한 역차별이다.” “이슬람교에 관해서도 저렇게 표현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퍼포먼스가 싸우고자 하는 것은 보좌에 앉은 마리 앙투와네트입니다. 이 퍼포먼스가 공격하고 조롱하는 것이 기독교라면, 이것은 거꾸로 기독교가 아직 보좌에 앉은, 사회 문화의 주류리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악플보다 더 슬픈 것이 무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음' 보다는 차라리 ‘비판적 관심'이 낫습니다. 이런 종류의 문화적 표현들이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교를 공격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이 더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사회 문화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는 뜻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개막식 공연이 꼭 기분 나빠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조롱은 기분은 나쁘지만, 여전히 기독교가 사회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확인시켜 준 사건이기도 합니다. 


2. 동의할 수 없는 비전


어떤 새로운 생각이 ‘지배 이론’이 되려면 결국 대중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1960년대 미국의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 성공했던 이유는, 적어도 흑인 인권 이슈가 흑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회 문제라는 사회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집단의 이익이 아닌, 전체 사회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었고, 결국 이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올림픽 개막식 퍼포먼스를 기획한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세상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보고 있는 올림픽 개막식에 사람의 머리가 잘리는 장면이 포함되고, 옷을 입은 둥 마는 둥 한 배우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건전한 비판이나 정당한 문제제기 보다, 조롱으로 보였습니다. 흠집내기나 편가르기가 목적이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일에 진지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성숙한 어린이들의 불장난처럼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유대 지도자들의 긴급 회의가 나옵니다. 교회가 계속 힘과 인기를 얻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을 나눕니다. 이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일어나 이야기합니다: “..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 (사도행전 5:38-39). 


파리 올림픽 개막식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저 묵묵히 우리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반드시 온다는 점에 희망을 얻고, 분노를 내려놓습니다. 주님의 분명한 뜻이 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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