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말씀으로 여는 아침] 마태복음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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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으로 여는 아침은 글로 대신합니다. 제가 알러지를 세게 맞아서, 정신이 없네요 🤒
이 본문은 이번 주일 설교의 본문이기도 합니다. 프리퀄처럼 써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유대인에게 '잘 알려진 낯선 땅'이었습니다. 해상 무역으로 번성했던 고대 페니키아의 중심지로 화려하고 부유했던 동시에, 우상 숭배의 상징적 도시이기도했습니다(물건만 수입한 것이 아니라, 종교도 수입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적 경계 바깥, 언약의 바깥처럼 여겨지던 도시였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 장 제르맹 드루에(1784)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에스겔 선지자는 26-28장에 걸쳐서 두로와 시돈에 임할 심판을 예언합니다.
[에스겔 26:7]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왕들 가운데 으뜸가는 왕,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북쪽에서 데려다가 두로를 치겠다. 그가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많은 백성을 이끌고 올 것이다. [에스겔 26:21] 내가 너를 완전히 멸망시켜서 없애 버리겠다. 사람들이 너를 찾아도, 다시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심판의 이유도 제시됩니다. 교만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에스겔 28:2] "사람아, 두로의 통치자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너는 네가 신이라고 하고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마음 속으로 신이라도 된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에스겔 28:5] 너는, 무역을 해도 큰 지혜를 가지고 하였으므로, 네 재산을 늘렸다. 그래서 네 재산 때문에 네 마음이 교만해졌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바로 이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마가복음 7장에 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마가는 이 여인을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막 7:26). 그런데 마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자"라고 기록합니다(마 15:22). 신약학계의 지배적 이론은 마가복음이 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마태가 마가복음과 다른 기록들을 참조해 마태복음을 썼다는 것인데요. 이 이론을 따른다면, 마태는 마가가 "시로페니키아 출신 그리스인"이라고 한 것을 구태여 "가나안 여인"으로 쓴 것이 됩니다. 가나안은 사라진 지역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정복하고 내쫓았던 이들이었지요. '가나안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적이었고 경계 밖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바깥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지금 땅 끝에 가 계시고, 언약과 가장 먼 사람을 만나신 셈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릅니다(22절). 그리고 예수님의 시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향한 신뢰를 바꾸지 않습니다. 끝까지 순종하고, 끝까지 주님을 의지합니다. 믿음은 때로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밖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많은 경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랍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납니다. 그는 유대적/율법적 세계관에 인이 박힌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세계관이 강했는지, 다른 사람들을 해하는 일까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정신 나간 놈들'을 체포하기도 했고,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세계관을 180도 바꾼 시간이 있었는데 눈이 멀었을 때였습니다. 살기등등해서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길에 강한 빛을 보았고,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자기 세계관에 눈이 멀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 -- 복음적 세계관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요셉이 있습니다. 요셉의 믿음이 자란 시기는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고 감옥살이 하던 때였습니다.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게 매맞고, 갇히고, 배신 당하던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이때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던지, 자기를 팔아 넘긴 형들에게 품었던 앙심도 다 녹아버렸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도 못난 형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정성으로 기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 또 가나안 여인은 중의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방 세계이면서 교만함과 우상숭배라는 죄에 물든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배제된 이방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죄와 심판의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새로운 눈을 뜨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후발주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들은 낮은 자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바울이 그랬고, 이방인들이 그랬습니다. 우리에게도 낮은 마음을 주시길 소망합니다. 죄를 넘어설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길 소망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내 믿음이 자랐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어떤 요인들이 있었나요?
지금 내게 필요한 낮은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 마음이 있다면,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이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까요?
[찬양 - New Wine]
